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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마시며

울릉문학 제16권이 도착한 사연은

by 빠피홍 2023. 11. 16.

 

 

 

 

울릉문학 제16집이 도착한 사연은

 

 

지난달 울릉문화원 최수영 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출향인들의 기고문을 싣는 코너가 있는데 원고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각 향우회에 원고청탁을 했음에도 희망자가 없어 갑작스러운 부탁이지만 마감시간도 얼마 남지 않고 하여 꼭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에도 몇 차례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었는데 마침 도동 우완산책로가 일부 개통되었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글을 써 보기로 했다. 최근에 ‘울릉도의 대변신’이라는 주제의 글도 쓰고 있는 터라 이중에서 일부 인용하여 쓰면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냈더니 오늘 책이 도착했다.

 

울릉문학 제16권으로 울릉도의 문학 동호인들이 펴내는 울릉문학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하고있는 그들의 노력이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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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항 양안(兩岸) 해안산책로의 추억

 

 

올 7월 촛대암에서 행남등대로 올라가는 소라계단 못 미쳐 오징어 모양의 해상로드가 개통되었다. 행남등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바다색은 짙고 옅은 각종 비취색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이 해상다리는 도동항 터미널에서 저동 촛대암까지 이어지는 좌안산책로의 마지막 퍼즐인 셈이다. 태풍으로 파손된 일곱 무지개다리를 새롭게 보완하여 만들어진 명품 다리인 것이다. 또한 9월에는 사동리에서 도동항쪽으로 해안도로가 일부나마 개통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도동항에서 오른쪽 와록사 쪽의 해안도로는 공사가 중단된 채 아직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있다.

일찍 고향을 떠나온 나는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12년과 비록 방학동안 뿐이었지만 대학생활 4년이 내가 울릉도에 머물렀던 유일한 시간들이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친구들의 안부 그리고 어떻게 변했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결국 60여년의 긴 세월은 육지에서 지낸 셈이어서 짧은 세월을 울릉도에서 보냈던 나로서는 도동항이 그나마 유년시절 나의 유일한 활동무대였던 셈이다.

 

예전의 도동항은 긴 축대를 사이에 두고 왼쪽은 ‘작은연변’이라 불리며 주로 작은 강고배들이 들락거리던 포구였고 오른쪽은 큰 발동선이나 연락선을 이어주던 하시게(사람과 화물을 실어나르던 전마선)가 분주히 다니던 ‘큰연변‘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지금의 터미널 승객전용 인도교가 있는 곳이 양쪽 축항을 갈랐던 긴 축대가 있던 곳인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녁밥을 먹고 바람 쏘이러 바닷가로 내려오면 늘 머물던 곳이었다.

지금은 호텔 건물로 변했지만 부둣가 ‘오독이상’의 왼쪽에 있던 2층 일본 집이 내가 살던 곳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 1956년경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라곤 크고 작은 배들이 분주히 다니는 도동항이었다. ‘작은연변’이라 불리던 이 포구는 내겐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등대가 있었고 아침저녁으로 낚싯대를 들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 임연수 낚시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다. 깜깜한 밤에는 등대 근처에서 플래시를 비치면 게들이 기어 올라와 버킷에 한가득 담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포구안쪽 바위에 대형 문어가 굼실굼실하는 것이 보였다. 어린 나로서는 이놈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 포구 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문어다! 문어다! 를 몇 번 외쳤고 어른들이 얼른 다가와 잡았다. 내 덕에 큰 문어를 잡았음에도 그들은 내게 문어다리 한쪽도 떼어주지 않고 횡재했다며 희희덕거리면서 떠나버렸는데 괘씸했던 그들 생각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큰소리로 항의라도 했을 것이다. 왜 내 몫은 떼어주지 않았느냐고. 어린 나이여서 내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못했지만 도동항하면 너무나 분했던 그때가 항상 떠오른다.

고기잡이 나갔던 작은 강고배가 항구로 돌아와 뭍으로 배를 올릴 때는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거들었다. 꼬마인 나도 쪼르르 달려가 비록 고사리 손이지만 강고를 뭍으로 올리는 작업에 동참을 하곤 했었다. 주로 오징어잡이와 손꽁치잡이 배였는데 선주가 고맙다는 표시로 오징어나 꽁치 한두 마리를 던져 주었는데 어찌나 신이 나든지 이를 들고 집으로 재빨리 달려가던 때가 새삼스럽다.

‘작은연변’에는 많은 괭이갈매기가 날아다니면서 물 위에 떠있는 오징어창자를 낚아채곤 했는데 하루는 작은 나무판자에 오징어내장을 낚시 바늘에 꿰어 냅다 던져놓았더니 갈매기가 걸려들었다. 한 번도 갈매기를 내 손에 잡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줄을 당겨 실체를 만져보고 이내 풀어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겨울이면 잠수선(우린 머구리선이라고 불렀다)이 잡아온 전복을 육지에 내다 팔기위해 둥근 대나무바구니에 담아 굵은 로프에 묶어 보관하던 바다 저장소이기도 했다. 로프에 묶여있는 수십 개의 대나무바구니가 물속에 잠긴 채 화물선으로 육지로 나갈 때까지 얼마동안을 기다려야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포구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축항 쪽으로 얼른 내려가 굵은 밧줄을 당겨 바구니 위에 얽어매어놓은 작은 그물망을 풀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전복들이 가득했다. 겁이 난 나는 한 개만 빼내고 그물망을 묶지도 않은 채 그냥 놓아버리고 얼른 집으로 도망쳐왔다. 출하 시에 전복 한 마리도 들어있지 않은 빈 바구니를 발견했을 주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아마 그 주인은 전일조씨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뒷골목 그의 집 앞에는 언제나 시커먼 건해삼이 가마니에 놓인 채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잠수선 사업을 하던 그의 소유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어느 날은 크고 굵은 향나무를 가득 실은 전마선(하시게)이 들어오는 것도 몇 차례 보았다. 울릉도 전역 해안 절벽에 가득했던 향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업용으로 향나무를 베어낸다는 것은 지금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향나무 벌채를 했을 것이고 향나무 조각품과 제례용 향으로 판매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예부터 ‘향’하면 울향(鬱香)이 으뜸이었다고 들은 바 있다. ‘작은연변’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높은 절벽에 2000년이 넘었다는 최고령 향나무가 서 있다. 바로 우리 집 뒤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름길이어서 바로 올라가보기로 하고 친구 김종문과 몇몇 친구들이 도전을 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바위틈에서 풀을 잡고 몇 단계를 가까스로 올라갔으나 종내 포기하고 만 적이 있었다. 뒤로 나가떨어질 번한 아찔했던 순간이 몇 차례 있은 후였다. 향나무 있는 곳에 가려면 저동 쪽 고개에 위치한 송신소 옆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유일했는데 한참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었기 때문에 지름길을 찾으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1985년10월 태풍 브랜다로 인해 큰 가지 한쪽이 부러졌으나 아직도 수천 년의 위엄을 굳건히 지키고 있음은 그나마 큰 다행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북이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바다로 돌려보내던 모습도 생생하다. 포구를 벗어날 때까지 몇 차례나 물속에서 목을 들어 올리며 많은 구경꾼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다. 우린 이를 자기 목숨을 살려준 감사의 뜻으로 해석했고 모두들 오징어 풍어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지금 터미널이 있던 곳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바로 위의 넓적한 큰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우리들의 놀이터가 있었다. 바위를 날듯이 타고 올라가면 꽤 넓은 땅이 나오는데 우린 이곳에서 자주 장난치며 놀았다. 이곳에서 ‘작은연변’ 쪽으로는 거의 직벽으로 된 낭떠러지인데 빨간 볼뚜(보리수나무 열매)가 탐스럽게 익어있어 이를 따러 내려가다가 미끄러졌다. 족히 5~6미터나 되는 자갈과 흙이 깔린 내리막인데 사타구니가 나무에 걸리는 통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양다리가 나무에 걸린 것이 천운이었다. 잘 익은 보리수열매는 어느 곳이든 아슬아슬한 절벽에 있어 어린 우리들에게는 목숨을 건 귀한 선물이었던 셈이다. 친구 이용기의 도움으로 간신히 올라올 수 있었지만 지금도 아찔했던 그 순간이 잊혀 지지 않는다.

등대 뒤편 ‘딴바우’ 왼쪽은 바닷물 색이 검고 짙게 보여 겁이 날 정도였다. 오랜 세월 침식된 바위 안쪽은 보는 것만으로도 괴물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아 어둡고 무서웠다. 뱃살이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간 큰 고래가 밧줄에 묶인 채 파도에 출렁이던 곳이기도 하고 인분을 버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는 하수처리 시설이 없어 똥지게꾼들이 일상으로 부어놓던 인분처리장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곳에 버렸고 주위에는 인분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던 시절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울릉병원에 근무하던 이종진이와 함께 유년기부터 궁금했던 이 해식굴(海蝕窟)의 존재를 캐고 싶었다. 안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는 구멍이 있다느니 완전히 막혔다느니 소문만 무성하던 때라 덤벼보고 싶었다. 마침 체격 좋고 몸도 날렵한 멋쟁이 종진이와 함께 도전하기로 했다. 높은 해안 그늘에 가려 푸르다 못해 시꺼먼 색깔의 바다 속은 무서웠다. 물 밑에서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다리를 잡아당길 것 같은 공포감도 들었다. 내가 앞서고 종진이가 뒤따르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몇 차례 반복하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희미한 빛줄기가 보였다. 바위를 때리는 물소리도 철썩거렸다. 순간 엄습했던 공포감은 사라지고 드디어 해냈다는데 서로를 격려하며 기뻐했다. 행남산책로 초입의 작은 쇠다리 안쪽 깊이 들어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빠져나왔던 출구는 지금도 그대로인 채 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는 일정한 운율로 이어지며 그곳에 남아있다.

대학생이 되어 방학에 집에 들어온 나는 낮에는 주로 잠을 자고 밤이면 책을 읽곤 했었는데 새벽녘에 창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와 함께 낚시를 가는 멤버였다. 배주인의 허락도 없이 포구에 띄워두었던 강고배를 타고 살구남 쪽 앞바다에서 전갱이 낚시를 몇 차례 했다. 사방이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낚싯줄만 넣으면 제법 씨알이 굵은 전갱이들이 올라왔다. 그 때 함께 했던 아이들은 누구였는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그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놓고 옛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등대 뒤쪽 ‘딴바우’ 못 미쳐 바위가 약간 패인 곳에는 망치어(망상어)가 잘 잡혔다. 아버지와 함께 한 낚시는 아마 이 망치낚시가 유일했던 것 같다. 난 이때 고기 뱃속에서 새끼가 나오는 것을 처음 보고 신기해한 적이 있었다. 끊어진 해안에서 이십 여 미터 떨어져있는 작은 바위섬인 ‘딴바우’는 우리들 놀이터였다. 지금 그 바위는 터미널 근처 어딘가에 묻혀있겠지만 여름이면 우린 빨리가기와 물속에서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누가 오래 버티는지 내기하던 곳이기도 했다. 우린 이곳에서 수영을 배웠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울릉도식 수영연습 첫 단계는 굵고 큰 통나무를 바다에 던져놓고 아이를 물속으로 빠뜨리는 교습방법이다. 보통 ‘시라’라고 불리는 나무인데 배를 뭍으로 끌어올릴 때 배 바닥에 까는 통나무다. 배에 쇠줄을 묶고 일종의 지렛대인 돈끼라고 불리던 장치로 배를 끌어올릴 때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헤엄 못 치는 아이들이 통나무를 잡아야 살 수 있기에 양다리와 팔로 안간힘을 쓰면서 절로 배우게 하는 것이었다.

 

도동항의 우안 쪽 해안도로는 지금도 크게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파도가 심하게 일면 출입을 금지한다는 팻말이 붙은 철문이 아직도 긴 세월 그대로 있다. 태풍이 지나고 며칠 후면 바다는 너울이 크게 일며 ‘큰연변’ 부둣가 모래사장 안쪽으로 길게 바닷물이 들어오고 어린 우리들은 물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큰 파도타기 놀이에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지친 몸으로 모래사장으로 돌아올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파도가 우리들을 안으로 밀었다가 도로 바다로 끌어 댕기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들락날락하면서 몸을 모래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리고 양손가락으로 모래를 꽉 움켜쥐고 물이 빠질 즈음 잽싸게 일어나 탈출하던 우리들이었다.

우안도로에서 100여 미터 들어가면 첫 번째 맞이하는 작은 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항상 위험했다. 철판다리가 놓여있었는데 너무 좁고 미끄러워 간혹 사고가 나곤 했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육지인이 고무신을 바닷물에 빠뜨린 적이 있었는데 내가 얼른 바지를 벗고 발가벗은 채로 물에 뛰어 들어가 주워준 적이 있었다. 당황해 하는 육지인에게 아마도 나의 용맹을 자랑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물속으로 헤집고 다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다리를 건너면 바로 평평한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도 가끔 낚시를 했지만 코너를 돌아 바닷물이 항상 철썩이며 길 위로 넘쳐 올라오는 미끄럽고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면 내가 임연수와 전갱이 그리고 고등어 새끼들을 잡던 곳이다. 아침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와 고기를 잡았다. 뽁지라고 부르던 복어새끼는 낚싯대만 드리우면 늘 미끼를 먼저 채곤 하는데 재수 없다고 패대기치던 그때가 눈에 선하다. 수십 명이 늘어서서 낚싯줄을 드리우던 그 모습 또한 옛 추억이 되었다. 여름이면 이곳이 울릉도의 유일한 수영대회 장소로 변모했다. 한 때 길 가운데 술과 생선회를 팔던 곳에서 이곳까지 헤엄쳐오는 수영장인 셈이었다.

도동항에서 오른쪽 맨 끝 쪽은 연락선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다. 갯바위 밑의 저지대 움푹 파인 곳에는 새끼손가락만한 작은 고기들과 새끼 게가 간혹 들어와 있었는데 이곳에서 놀다가 배가 들어오면 도동항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 들어온다고 큰소리로 알리던 곳이다. 지금은 방파제로 테라포트가 가득히 쌓여있는 곳으로 변했지만 보통은 이곳까지가 우리들이 늘 다니던 곳이다. 그리고 길이 끝난 곳에서 자주 낚시를 했다. 넓은 갯바위에서는 사배기(방어새끼)와 돔 낚시도 했었다. 혹돔 한 마리를 잡은 것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공사 중 근로자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도 있었고 바위가 굴러 떨어져 파손된 곳도 있지만 사동리의 와록사 해안산책로가 구름다리와 피암터널을 잘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무척 반갑다. 수 년 전 사동리 해안 끝 쪽 웅퉁게를 몇 차례 가본 적이 있었는데 끊어져있던 해안에 새로운 산책로가 일부나마 만들어졌다니 마지막 남은 도동항 산책로와 맞닿을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빠른 시일에 공사를 재개하여 좌안산책로와 우안산책로가 연결되어 나란히 관광객들의 사랑 받기를 바래본다. 내가 고향에 얼마나 더 다녀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양안 산책로가 완성되는 날은 옛 추억을 되씹으며 반드시 찾아갈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 찾아갈 것이다.

 

 

 

@2023년9월

 

(전) 재경울릉향우회장

울사모 편집장, 에세이스트 홍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