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4월이 내일모레인데 눈이 꽤나 많이 내린다. 어제 밤부터 내렸는가본데 날씨가 포근한 탓에 내리자마자 이내 녹아버린다. 대선이 끝나고 며칠 되지 않아 내린 봄눈이어서 일까 새롭고 묘한 느낌이다. 거실에 앉아 눈 내리는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면서 어느새 막걸리 잔을 잡는 내 모습에 짐짓 놀라기도 하지만 어느새 입가엔 미소가 돈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뒷방으로 내려앉은 노인이 되어 봄눈 녹듯 차분한 마음이 되어서이다.
지난 3월9일 대통령선거 개표만큼 스릴 있는 드라마가 또 있었을까? 자정을 넘어서면서 두 주인공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시소게임에 내 일찍 이런 절망과 환희의 시간이 교차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난 공중파의 개표방송을 털어놓고 음원을 죽인 채 유튜브 ‘정광용TV’의 생중계방송을 보면서 몇 시간을 마음 졸이며 보냈다. 투박한 경상도말로 질펀하게 늘어놓는 그의 진행이 코믹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전이 되는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합을 넣었던 나였다.
선거기간 내내 신문의 관심부분만 골라서 볼 뿐 TV는 잘 보지 않았다. 방송에 나오는 패널 들의 온갖 궤변을 보고 듣는다는 것이 내겐 큰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짜증스러운 선거기간이었다. 결과가 확정되자 이제 문재인의 이 지긋지긋한 과대망상 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데 안도를 하며 5년간 받아왔던 스트레스가 일거에 녹아내리는 듯 했다.
선거가 끝난 며칠간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제 무언가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부터 모든 걸 내려놓자. 후배들이 알아서 잘 해주질 않겠는가?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옮기든 용산으로 옮기든 인수위원회에 서울법대 출신들로 가득 채우든 말든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문재인 정권보다야 백배천배 낫지 않겠는가? 이제 곧 팔십이 되어가는 처지에 정치권의 일희일비를 또다시 가슴조리며 보고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나 혼자 모든 짐을 지듯 꿍꿍 앓던 나의 허상을 이제 눈 녹듯이 녹여버리자는데 귀결 되었다. 정치권의 갑론을박과 시시비비는 듣지도 보지도 않기로 했다. 그저 결과만 확인하기로 했다. 그들을 믿고 맡기기로 한 때문이다.
수 십 개 넘게 보던 유튜브 채널의 구독버턴을 대부분 취소로 세팅하고 몇 개만 남겨두었는데 그래도 아직 많다. 신인균의 국방TV, 김영호교수의 세상읽기, 박찬종TV, 조갑제TV, 최병묵의 FACT, 11시 김광일 쇼, 정광용TV, 이춘근의 국제정치, 와이타임즈 그리고 정규재 텐텐뉴스 등인데 이 또한 섬네일을 봐가면서 보기로 하고 그 외 몇 개 채널도 건별로 선별하여 구독하는 걸로 결정했다. TV뉴스는 저녁 9시의 TV조선을 주로 보는데 이 또한 골라서 보기로 했다. 시시콜콜 가십 같은 것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좋은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정원에 가득했던 봄눈이 모두 녹아버렸다. 진보학자인 전북대학 강준만 교수의 인터뷰처럼 지난 5년간 위선과 오만 그리고 내로남불로 점철되었던 이 정권이 오늘의 봄눈처럼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저 기쁘고 마음 한 곳에 응어리져있던 ‘내로남불’ 5년의 묵은 가래를 이제 시원하게 뱉어도 될 듯하다. 누가 내게 정치에 관해 물어온다면 난 답하리다. 뒷방으로 건너 온지 오래되었다고.
* 강준만 교수의 인터뷰 (2020년10월25일 중앙일보)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말았다...
굳이 지적할 것도 없이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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