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몽돌의 추억
‘내수전 전망대’ 부근에서 관광객 한 명이 추락사했다는 것과 ‘성인봉’ 하산 길에 일흔 살 넘은 노인이 눈 쌓인 산 속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이 동시에 나왔다. 엊그제 하루 이틀 사이 내 고향 울릉도에서 날아온 소식이다. 눈이었다. 바로 이 눈 때문에 한 분은 실족사한 것 같고 다른 한 분은 무리한 눈 속 산행으로 길을 잃어 아직도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울릉도의 눈은 쩍쩍 달라붙는 두텁고 무거운 눈이다.
울릉도의 눈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고를 불러오기도 한다. 제주도와 울릉도가 모르긴 해도 눈이 제일 많이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울릉도의 눈은 정말 엄청나다. ‘설국(雪國)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줄기차게 내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얘기로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2미터 가까운 눈이 내려 지붕 위로 길을 내어 다녔다고 한다.
어제 기상대의 예보대로 우리 동네에도 오늘 눈이 꽤 많이 내렸다. 몇 개월 동안 처박아두었던 먼지 묻은 카메라를 둘러메고 산책 겸해서 팔당호 쪽을 다녀오기로 했다.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고 건너 ‘하남’ 쪽의 야산들은 아예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오리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자주 눈에 띄는 학이나 왜가리도 보이지 않는다. 콧등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긴 한데 미답의 눈 내리는 길을 걸으면서 아련한 옛날의 기억이 새로워진다.
울릉도의 아이들은 주로 대나무스키를 탄다. 스키라고 해봐야 왕대가 아닌 조릿대 몇 개를 이어 붙이고 앞부분이 위로 들리도록 불로 살짝 지져 만든 것이 고작이다. 이 스키로 앞 골목 뒷골목의 경사진 언덕을 수 없이 다닌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나무로 만든 군용 스키(군인들이 타던 것이라 해서 헤타이(兵隊)스키라고 불렀다)를 타고 '깍개등' 밭에서 재빨리 회전을 못해 소나무가지에 찔려 죽을 뻔했던 일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사동’과 ‘저동’에는 노래자랑 대회인 ‘콩쿨대회’가 정월 보름 전후로 자주 열리곤 했다. 노래자랑이 끝난 후 ‘도동‘으로 돌아오는 길은 미끄러웠다. 둥근 보름달과 하얀 눈이 어우러져 낮 같이 훤히 밝혀주는 가운데 눈 쌓인 내리막길을 젊은이들이 서로 밀고 댕기고 미끄러지면서 남녀 간의 장난기도 발동했었다. 일부러 밀고 넘어져도 그저 까르르 웃기만 했던 그 시절이었다. 지금은 모두들 할머니가 되었을 젊은 시절의 여인들이 생각난다.
언제였든가 좋아했던 여자 친구와 함께 4~50센티미터의 깊은 눈 속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적막감이 돌던 산길을 걸었었다, 눈길을 헤쳐 나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도 눈 내리는 산길을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아련한 옛 추억이다. 보름달이 떠있던 늦은 밤, 눈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여자 친구와 ‘사동’ 해변으로 데이트를 떠났던 때가 떠오른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크고 둥근 그 많던 몽돌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는 지금도 엊그제 일인 양 내 귓전을 때린다.
눈 때문에 공연히 울적해졌나 보다. 55년 전, 보름달이 높이 뜬 바닷가 몽돌에 쌓였던 하얀 눈이 아직도 아른거림은 스무 살 내 청춘의 자화상은 아닐 런지?
카메라를 자주 쓰지 않아서인지 렌즈 안에 얼룩이 많이 끼어 사진이 엉망이다. 며칠 내로 청소를 해야겠다.
@2022년1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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