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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야기

반장을 사임하며

by 빠피홍 2020. 7. 27.

 

4페이지에 걸쳐 임원회의 자료를 준비했지만 회의를 진행하기도 전에 정관의 해석을 달리함으로 모든게 끝이나고 말았다

 

 

반장을 사임하며

 

 

금년 말이면 내가 맡고 있는 반장과 감사임기가 끝나게 된다. 반장의 임기는 2년을, 감사는 후반기부터 맡게 되었으니 1년을 꽉 채우게 되는 셈이다. 임원이라고 해봐야 다섯 명인 우리 마을이지만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에 처음으로 맡게 된 직책이다.

 

약 8년간 많은 변화를 했다. 주로 내가 주도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하나씩 끈질기게 설득을 하며 풀어나간 결과였다. 전 이장에게 마을 정관을 보여 달라고 하자 왜 정관을 보려고 하느냐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누렇게 퇴색된 정관을 사진으로 찍어서 이를 몇 차례 수정한 일은 지금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던 세 사람이 술 한잔하면서 논의하면 그것으로 의결이 되었고 주민의 동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고문을 두자는 내 주장에 5:5의 팽팽한 대결 끝에 이장이 가부동수의 칼을 빼 들어 부결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기득세력들이 나를 견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으나 결국 아무도 않으려는 반장을 맡으면서 반장을 임원으로 하자는 어느 주민의 제안에 제도권에 들어와 하나씩 개선을 해나갈 수 있었다.

 

특히, 최근에 와서 임원들과 주민의 단톡방인 ‘임원방’과 ‘주민대화방’을 그나마 억지로 주창하여 만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 주민대화방’이 왜 필요하냐고 내 제안을 한마디로 묵살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많은 진전이 있어온 셈이다. 새로 선출된 이장이 오십대고 회의진행과 업무진행의 기본훈련이 안된 사람이어서 난 많은 정성을 들여 조언도 하고 총무역할도 맡아 그를 도와주어서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고인이 된 전 이장과 많이 다투고 건의하고 협상하고 현재의 이장까지 꽤 보람 있었던 8년이었다.

 

그러나 면사무소로부터 특별지원자금 220만원이 마을에 배정 되어 이를 어디에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일로 인해 해프닝이 벌어졌다. 작년 이맘때도 마찬가지로 200여만원의 특별지원금이 내려와서 한바탕 소동 끝에 처리된 적이 있었던 터라 카톡 임원방에 먼저 주민의 의견을 듣고 이를 취합하여 임원회의에서 결정을 하자고 조언을 했음에도 이장이 일방적으로 공지를 해버렸다. 즉, 마을회관 2층에 에어컨, 찜질방 옷장, 아래층 식탁 및 의자를 구입하겠다는 공지였다. 월요일 회의를 하면서 에어컨 이야기만 나오지 않았을 뿐 나머지 이야기는 잠깐 나온 것뿐이었다.

 

마을 정관 제8조에 “마을의 중요사항에 대하여는 이장 또는 임원이 회의를 소집할 수 있으며 의결사항은 반드시 주민에게 회부하여 의결을 득한다”라고 되어있음에도 의결을 하지 않고 이장 독단으로 공지를 한 것이었다. 이미 면사무소에 내용을 통보하였으니 난 추후라도 동 내용을 추인해야겠기에 임원회의 소집을 세 차례나 요청하였음에도 묵살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네 번째 요청 끝에 가까스로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 세 명이 참석하였으나 정관의 해석을 둘러싸고 심한 언쟁을 벌인 끝에 나는 더 이상 마을을 위해 봉사가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사임을 밝히고 이튿날 마을대화방에 사임한다고 발표를 했다.

 

동네 큰어르신이 이 내용을 보고 만나자고 하여 그로부터 좋은 이야기도 들었고 이튿날 전현직 임원들에게 점심을 내면서 모두들 화해하고 잘 해보자고, 그리고 어제 또 중복이라고 임원들과 함께 직접 등심을 구우며 이것저것 내게 배려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미안스러웠다. 아직도 현역에서 일을 하시는 80대 노인분이 동네 임원들의 불미스러운 이런 일에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이 정말 죄송하지만 나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큰어르신이나 이장이나 총무도 내가 사임을 번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내 입으로 다시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몇 차례의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사임번복을 기정사실화하는 것 같다. 임기를 5개월 남겨두고 모처럼 제도권에 들어가서 마을 발전을 위해 틀을 만들어가는 도중에 왜 내가 그만두게 되었는지 아직도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정관 제8조가 유명무실해지면 이장의 독주를 견제할 장치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데 아직도 그들은 모르고 있다. 내가 굳이 관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옛날식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말이다.

 

이제부터 평주민으로서 마을을 위해 도울 일이 있으면 하되 임원으로서 참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단순히 화가 나서 사임을 한 것이라면 쌍방 어느 쪽으로부터 사과를 받으면 될 수 있지만 이건 아니다. 이전까지 몇 명이 마음대로 하던 것을 겨우 정관 8조를 만들어 중요사항에 대하여는 회의를 언제든지 소집하여 의결을 거친 후 주민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인데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큰어르신에게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2020년7월27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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