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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발해탐사선 1300호 선장 이덕영

by 빠피홍 2022. 12. 30.

왼쪽부터 울릉도 출신 이덕영선장(당시49세),이용호(당시36세), 임현규(당시27세),장철수(당시;38세)

 

 


   * 본 칼럼은 2009124일자 울사모칼럼난에 게재한 것으로 현재의 시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발해탐사선 1300호 선장 이덕영

 


1998년1월23일 오후 4시14분경,
탐사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선으로 흘러나왔다.

“파도가 계속 (도고) 섬 쪽으로 몰아치고 있어 자체 접안이 어렵습니다. 예인선을 불러 주세요!” 오후 8시 50분경, 다시 연락이 왔다. “예인선이 도착했습니다!” 안도의 순간도 잠시, 3시간 뒤 뗏목이 있는 일본 도고 섬 해역에 폭풍주의보가 발령돼 일본 해경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음 날인 24일 오전 7시 5분경. 대원들의 육신은 거친 파도에 사라졌다.


 당일 각 일간 신문에 대서특필한 내용의 일부다.

발해1300호 항해도

 

안타깝게도 이 대원들 중에는 발해1300호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진 우리 울릉도 사나이 이덕영(李德榮) 선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탐험, 탐사, 모험, 이런 것들이 우리들 곁에 다가오는 순간 우린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그곳이 어디든,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비록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모두 나름대로의 꿈을 찾아서 모험을 시도하고 싶어 한다.


1893년 난센이 프람호를 타고 시도한 북극탐험이나 영하 50도의 추운 날씨에 북극과 남극을 도전한 아문센의 탐험 그리고 영국의 탐사대원인 말로리가 에베레스트산을 처음으로 등정하려다가 사망한 그 숭고한 모험 들이 말만 들어도 우리를 숙연케 하고 있지만 이 모두가 아름다운 도전이었다. 적어도 젊은이들에게는 말이다.

 

요즘,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가 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다.
다윈은 1831년12월 탐험선 ‘비글’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항에서 출발하여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섬까지 모험을 하였다. 거기서 ‘핀치’ 새로부터 섬에 따라 새의 부리가 다양하게 변화되어있음을 발견하고 이후 진화론을 증명하는 ‘종의 기원’을 발표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이렇게 좌절과 영광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허상의 묘약일지도 모르겠다. 모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권영인 박사를 주축으로 한 탐험대가 찰스 다윈의 탐험로를 따라 지구온난화 징후들을 포착하고자 미국 메릴랜드 주의 한 포구에서 탐사선 ‘장보고호’의 진수식을 끝냈다는 소식도 작년 9월에 전해졌다. 이 돛단배가 411일간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치고 2010년에 개선하길 기대하며 오늘 현재도 항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2000년 발해뗏목 탐사대’를 조직한 방의천(方宜天 당시·42,·서울 서대문구)씨는 3월 1일 보름간의 일정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울릉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934㎞의 대장정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덕영 선장의 발해1300호가 실패했던 그 루트를 따라 선배들이 못다 한 여정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많은 자금문제로 좌절하고 말며, 2005년에 다시 시도를 하였으나 영하 40도의 강추위와 3미터가 넘는 파도로 가까스로 구조되긴 했으되 또다시 실패를 하고 말았다.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르겠지만 숨진 탐사대원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던 방 대장은 또 도전할 것이라고 했다.

 

오늘이 울릉도 석포 출신의 이덕영(당시 49세로 발해1300호 선장)선장이 일본 도고섬 해역에서 네 명의 탐험대원과 함께 엄청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지 11년째 되는 날이다.

발해탐사선 1300호의 모습


삼나무로 만든 길이 14m, 폭 7m의 뗏목을 만든 발해탐사 4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주도까지 발해인이 오갔던 1244km 바닷길을 탐사하려 했으나 울릉도 앞바다에서 그만 방향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일본 쪽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뗏목엔 위성항법장치와 무선교신장비 등 최첨단 장비가 있었지만 심한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전복되고 만 것이다.

탐사대 대원들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밧줄이 묶인 자욱이 선명한 발목만이 돛대에 남아 있었다. 죽어서도 뗏목을 지키겠다는 마음 이어서였을까? 나중에야 그 남은 발목이 이덕영 선장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자체적인 항해능력이 없는 원시형태의 뗏목에 집채만 한 파도와 폭풍우, 더더구나 섬 주변의 암초는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으리라. '살아서만 돌아오라'는 주변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야 말았다.

 

울릉도에서 연습중인 대원들


고향을 일찍 떠나 온 나로서 이 선장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사진 속에서 보이는 이 선장은 매우 수더분하게 보였다. 이덕영 선장은 일찍이 푸른독도 가꾸기 모임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갖고 활동을 하였고 서울시에 구절초 3만본을 기증하는 등 우리나라 자생화 보급운동에도 앞장섰던 우리 꽃 지킴이기도 했다.

울릉인들은 과연 이덕영 선장을 기억하고 있을까?

 통영 미륵산에는 발해1300호의 장철수 대장과 대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고 한다.


우린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다. 비록 육신은 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대의 영혼은 수호신이 되어 울릉도를 영원히 지켜줄 것이다.
석포 어딘가에 이덕영 선장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동상과 뗏목 조각을 만들어 젊은 이들에게 “도전, 모험,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다.

 


2009년1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