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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울릉도의 대변신 -13-동쪽 섬의 슈바이처 3인, 울릉도에 기리 빛날 히포크라테스

by 빠피홍 2024. 4. 17.

                    진료하고 있는 안재용 전문의와 울릉군보건의료원 전경

 

 

 

[기고] 울릉도의 대변신 -13-

동쪽 섬의 슈바이처 3인, 울릉도에 기리 빛날 히포크라테스

 

 

울릉군보건의료원에 정형외과 전문의가 초빙되어 지난 3월11일부터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자연스레 회자되고 있다. 그간의 공백 때문이었을까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첫날부터 혼이 나간 듯 진료에 몰입하고 있는 안재용 전문의다. 그는 희말리야 원정대 주치의, 관동대학교 정형외과 교수와 아산충무병원 정형외과 과장 등을 역임한 전문의사다. 그의 합류로 울릉군민으로서는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울릉도는 필요한 전문의를 모시는 것이 무척 어려운 곳이다. 육지에 비해 제반여건이 좋지 않아 모두들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대부분 산악지형으로 되어있어 골절사고가 어느 곳보다 많아 정형외과는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장기간 울릉군민을 치료해줄 전문의가 없어 모두들 한숨만 쉬고 있는 형편에 정형외과 전문의가 입도하여 울릉군민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한 달 전부터 의대 증원문제로 정부와 의사협회가 마치 전쟁이라도 치룰 모양새다. 이번 의대증원에는 지방의료 문제를 다소나마 해결할 요량으로 지방대학에 많은 비중을 둔 것 같다. 지방에 의사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봉 3억 원을 준다고 해도 의사를 구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울릉도는 의료원장에서부터 전문의 확보에 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울릉군의료원의 필수인력인 내과, 외과, 응급의학과의 공보의(공중보건의사)조차 구할 수 없어 군수가 직접 나서서 보건복지부나 해군본부를 방문하여 읍소해야 하는 실정이다.

 

지금이야 10여개 과의 의료진을 포함한 많은 직원과 함께 번듯한 건물과 좋은 시설에서 보건의료원이 운영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맞는 맞춤형 의료서비스가 늘 부족한 것이 군민들의 불만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울릉도 인구나 1940년대의 인구가 일만 여 명으로 동일하지만 당시에는 전석봉(田石鳳)의사 혼자서 직원 한 두 명과 함께 진료를 담당했고 지금은 100여 명이 담당하고 있으니 당시의 의료현실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의사 전석봉과 1966년 송동섭 군수의 송별기념식에서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전의원(사진제공: 전상술씨와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장 황성웅씨)

 

울릉도의 의료활동은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내가 어렸을 적에는 병원이 딱 하나 뿐이었다. 지금의 울릉군의회가 있는 곳에 전석봉 의사가 운영하던 영제의원(永濟醫院)이었다. 남아있는 사진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정문 양쪽에 향나무가 있었던 것 같고 안으로 들어가면 소독약 냄새가 물씬 나는 전형적인 시골의 작은 병원이었다. 대기실에 걸려있던 우물가에서 물 긷는 긴 머리 여인의 빛바랜 사진도 소독약 냄새와 함께 내 기억 속에 녹아있다. 전석봉(1915~1982)은 울릉도 저동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대구사범을 다녔으며 경상북도에서 시행한 의술시험에 합격한 첫 울릉인이었다.

 

어떤 연유로 1943년에 남양리에서 개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 도동으로 옮겼다. 해방 전의 울릉도에서는 군민을 위한 의료활동이라고 해야 대구 자혜병원에서 한두 차례 순회진료나 오는 정도였고 1915년경에는 도동에 2명, 태하동에 1명의 의사가 있었다고는 하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고 1917년까지 병원이 없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당시만 해도 그는 울릉도의 천사와 다름없는 실로 보배 같은 존재였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무료진료는 다반사였고 섬사람들은 전의원에 대한 감사와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후덕한 그의 성품과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하는 탁월한 인술 때문이었을까 제5대 국회의원(1960년)에 당선되었으나 5.16혁명으로 인해 채 일 년도 아니 되는 의정생활을 마치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였던 인연으로 인해 빠른 시기에 1963년 울릉군보건소가 설립되었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후 1966년 울릉군립병원장(5과13병상)으로도 활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26년간의 의료활동을 마감하고 1969년 울릉도를 떠날 때 까지 그는 한의사였던 신촌어른 김하우옹(1912~1979)과 더불어 울릉도에 영원히 기억될 진정한 참 의술 인이었다.

                  울릉병원 천부 분원과 이일선 목사 내외, 오른쪽은 1959년 아프리카에서 같이 한 수바이처박사와 함께

 

울릉도에는 또 한 사람의 의사가 존재한다. 신학대학을 마치고 목회자가 된 후 1955년 서울대 의대 피부과를 졸업한 이일선(1922~1995) 목사는 1958년 아프리카에서 나환자들을 진료하던 앨버터 슈바이처박사를 찾아가 3개월간 같이 진료를 하게 된다. 슈바이처박사로부터 영향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원래의 그의 꿈이었을까 1961년에 그는 아내와 함께 울릉도를 찾아오게 되면서 18년간 울릉도 주민들을 위해 많은 봉사와 진료를 하게 된다. 당시의 모든 신문에는 서울대학 의대를 나온 의사가 편안한 육지생활을 뒤로한 채 질병과 결핵 그리고 한센병이 만연한 미지의 섬으로 향하는 그의 결기에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나중에 ‘울릉병원’으로 개명되긴 했지만 당초에는 ‘울릉도의원’으로 출발하여 저동과 천부에 분원까지 내며 치료와 복음전도를 하게 되었다. 그가 취급하는 모든 의약품이 미국에서 직접 온 것이라고 소문이 나 한동안 입소문이 자자하기도 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의 병원은 박정희장군 기념관 아래에 위치해있었고 나는 그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1965년 내가 방학을 이용해 학생활동을 하고 있던 중 약수터에 쓰레기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멘트가 필요했었다. 그를 찾아가 시멘트 몇 포대를 얻어 완성했고 겨울방학에는 그의 부인 오길화 여사와 만나 학생활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에서 보내왔다는 콩통조림과 일회용 비누 등을 잔뜩 얻어 이를 겨울방학에 연극멤버들과 나누어 쓰기도 했다.

 

의사 한 두 명으로 운영되던 보건소와 군립병원으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 울릉군보건의료원은 대규모 종합의료원으로 탈바꿈했다. 외과전문의인 원장을 위시해서 100여명의 직원이 불철주야 애쓰고 있다. 연간 50만 여명의 관광객이 드나들고 최근에는 여러 곳에서 호화여객선이 거의 매일 다니게 되어 의료수요가 늘어나고 의료원의 확대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004년 현재의 신청사로 옮기면서 울릉도에 첫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도 울릉군보건의료원이다. 보다나은 의료 서비스를 기대하는 울릉군민의 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주요의료진과 원장의 장기 공백이었다. 원장은 공무원 신분이어서 제반 대우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전문의에 비해 연봉이 삼분의 일 수준일 뿐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 근무를 해야 하는 여러 조건들로 인해 사명감 없이는 좀처럼 모셔오기 힘든 상황이다.

                        진료중인 김영헌 원장과 함께 의료원을 찾아 현장을 점검하고 의료진을 격려하는 남한권 군수

 

2001년 의사라고는 공보의 한 명 밖에 없던 시절 20개월가량 공석으로 남아있던 의료원에 대구시 북구 보건소장이었던 의사 김주열이 원장으로 부임한 때도 있었다. 모두들 울릉도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 섬이라는 인식이 강해 적은 급여와 교육·문화·생활시설 등이 상대적으로 열악하여 지원자가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은 지금도 어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또 한 명의 닥터, 김영헌 원장(1965년생, 계명대)이 역사의 흐름을 타고 뒤를 있고 있다. 한 번 오가기도 힘든 곳이 울릉도인데 그는 무려 세 번이나 울릉도에 왔다. 1995년 공보의로 울릉도에 온 그는 2년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육지로 나갔으며 2008년에 다시 울릉도로 돌아왔다. 무려 13년만이었지만 이번에는 원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의료사각지대였던 울릉도에서 6년간을 고군분투하며 의료원의 기반을 닦아놓고 군민들의 건강도 보살폈다. 그리고 또다시 본토로 떠났던 그가 대여섯 차례의 원장 공모가 있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응하지 않자 출도 8년만인 2021년에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한 번도 아닌 세 번 째나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울릉도에 온 것이다. 그 사유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울릉군수와 군의원들의 삼고초려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고 아름다운 울릉도의 매력과 함께 울릉군민들의 염원 또한 그가 돌아온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대구동산병원과 왜관중앙병원, 대구 동아메디병원 그리고 가창삼성요양병원 등을 거치면서 쌓은 그의 풍부한 의료 전반에 대한 경험은 울릉군민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해방을 전후하여 의료활동을 했던 영제의원의 의사 전석봉, 1960대 울릉병원의 의사 이일선 그리고 울릉군보건의료원의 의사 김영헌이 있어 오늘의 울릉도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울릉도의 슈바이처이자 한국의 슈바이처가 아니겠는가?

 

울릉도는 20여 년째 전국의 간암환자 1위를 기록하는 곳이고 일 년에 수 십 차례나 응급환자를 육지로 보내야하는, 그것도 때에 따라 헬기와 군함, 여객선 그리고 어선으로 이송할 수밖에 없는 위기의 현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관광객 50만을 넘어 100만 명의 목표가 가까워질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 보건의료원이다. 전문의를 모실 수 있는 사택도 럭셔리하게 준비하여 평생 한번 쯤 아름답고 멋진 환경에서 울릉인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의사들이 줄지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2024-03-31